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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 본 저녁 하늘은 마치 산불이라도 난듯 했다. |
#1.충북 알프스란 산줄기가 있다. 충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관이 빼어난 구병산(877m)과 속리산 천황봉(1058m), 문장대를 지나 묘봉(874m), 상학봉(834m)에 이르는, 총 거리 43.9㎞에 이르는 긴 산줄기다. 충북 보은군이 1999년 충북 알프스란 이름을 붙이고, 특허청에 등록을 한 뒤 등산객 유치에 힘쓴다는 산. 기존에 존재하는 산군을 엮고 등산로를 개설해 상품으로 만들어진 재미있는 산이다.
이번 산행에서 이 산줄기의 서북쪽 끝자락, 상학봉과 묘봉을 잇는 능선을 찾은 것은 우연이었다. 속리산으로 가기 위해 충북 괴산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내속리면으로 가던 중, 경북 상주군 운흥리에 이르러 범상찮은 바위 봉우리며 암릉이 멋진 산줄기를 만난 것이다.
천천히 자동차를 몰며 산을 올려다 보다 경북과 충북의 경계인 활목고개를 넘은 뒤 결국 운전을 멈췄다. 길가에 세워둔 충북 알프스란 팻말을 보고서였다. 핸들을 왼쪽으로 돌려 골짜기로 차를 몰았다. 이 땅의 산줄기에 ‘알프스’란 이름을 붙인 것도 모자라 특허청에 등록까지 한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어쨌거나 ‘알프스’란 이름은 아무 산에나 붙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포장 도로를 좀 따라가다 보니 어울리지 않게 넓은 주차장. 어쩐 일인지 자동차도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펼쳐보니 현 위치는 충북 보은군 신정리. 속리산 문장대가 지척이었다. 세속을 떠난 산이라 하여 속리(俗離)라 이름붙은 산엔 갈 때마다 사람 떼에 묻히다시피 했는데, 속리산 입구 10㎞ 못미처 제대로 된 속리산을 만난 것이다. 주차장 ‘묘봉 등산로 안내도’가 밝히는 산행 시간은 약 3~4시간. 상학봉과 묘봉을 돌아오는 10㎞도 안되는 산길이었다. 현재 시간이 낮 12시쯤이었으니, 빠르게 걸으면 관음봉까지 다녀온다 치더라도 어둠사리가 칠 때에는 하산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살필 것 없이 신발끈을 조였다.
#2. 계획없이 산에 가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흔치 않다. 산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걷는 산길은 등불없이 걷는 밤길과 다르지 않다. 밤길 걷는 것이야 몇번 넘어지면 그만이지만, 산길에서 길을 잘못드는 것은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다. 여기에다 천변만화하는 날씨까지 더하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두어 시간만 대책없이 비를 맞으면 비록 한여름이라도 저체온증으로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 곳이 바로 산이다.
그러나 계획없이 산에 가는 것만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흔히 산행을 위해 오밀조밀 준비하다 보면, 그 산에 대해 절반은 알게 되는 법. 산행이 주는 뜻밖의 재미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냥 가는 산은 다르다. 생각지도 않은 산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길을 걸으며 이외의 풍광을 접했을 때의 감동은 배가된다. 오랜 산행 경험이 있는 이들이 무계획 산행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때로 발길 닿는대로 산에 가는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무계획 산행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지도와 나침반, 헤드랜턴과 방수·방한복, 비상시 연락방법과 먹을거리 등은 필수다.
상학봉 오르는 산길은 거북바위 지나 계곡을 건너면서 시작됐다. 골짜기를 따라 거슬러 오른 길이 20~30분 정도 되었을까. 급경사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곧 암릉이 나타났다. 바위는 화강암, 날씨가 좋으니 리지화도 아닌데 등산화가 바위에 착착 달라 붙었다. 로프에 매달리고, 사다리를 오르며, 때로는 지리산이나 월출산의 통천문을 닮은 큰 바위문, 혹은 사람 몸 하나 지나기도 버거운 바위틈을 기는 암릉 등산이 시작됐다. 첨탑바위, 너럭바위, 토끼바위, 토끼굴, 공기돌 바위…. 길고 짧은 슬랩과 새미 클라이밍을 할만한 암벽들도 지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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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봉~관음봉 사이의 능선에서 바라본 해질녘 하늘. 첩첩산 위로 하늘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김종락기자 |
가히 기암 전시장이라 할 만했다. 이런 능선에 이런 아기자기한 바위가 있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북한산 의상능선을 좀 더 어지러우면서도 훨씬 재미있게 펼쳐놓았다고 할까. 속리산에서 청화산, 대미산을 지나 문경 뒤쪽의 황장산까지에 이르는 능선에도 이런 저런 바윗길이 많지만, 이토록 재미있는 암릉은 흔치 않았다. 물론 바위능선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이를 위해, 우회로도 곳곳에 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바윗길을 우회로를 걸으며 관음봉까지 간다는 목표를 달성할 일은 아니었다. 아끼듯 천천히 바위를 오르내렸다.
상학봉은 정상 부근 암봉에 학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묘봉은 기묘한 바위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3. 산길을 걷는 가장 큰 재미는 산을 오르내리며 그 산이 안고 있는 풍광을 보는 것이지만, 이 못지않은 재미는 하늘을 보는 것에 있기도 하다. 산 아래서 보는 산과 산정에 올라서 보는 산이 다르듯, 하늘도 산에서 보는 하늘은 느낌은 다르다. 산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하늘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리라. 정상에 오르면 첩첩산 너머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하늘도 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산에 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보통 모습일 뿐이다. 운이 좋을 경우, 산은 이보다 훨씬 더한 장관을 연출한다. 계획없이 상학봉·묘봉 능선을 걸었던 이날의 하늘이 그랬다.
상학봉 ~ 묘봉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은 길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묘봉에 이르러, 시간을 지체하게 한 것은 바윗길보다 해지기 직전의 하늘이었다. 파란색에서 녹색, 황색, 자주와 붉게 타는 노을을 거쳐 먹구름에 이르기까지 오색찬란하게 수놓아진 하늘의 모습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러다 구름 사이에서 쏟아져 내린 빛이 암릉에 부딪쳐 만들어내는 빛과 바위의 향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의 장관이 이랬을까. 이미 관음봉, 문장대 가기는 늦은 시각이었다. 바위와 하늘과 멀리 암릉에 비치는 빛과 멀리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첩첩산을 가슴 가득 안으며 산길을 걷다 보니 해는 금방 졌다.
하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낙엽으로 덮힌 급경사를 얼마간 빠르게 내려오다 보니 벌써 계곡길이었다. 다시 여유를 찾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리워 하늘을 올려 보았더니,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큰불이라도 난듯 하늘과 산이 시뻘겋게 타고 있었다.
# 가는 길충북 괴산~보은을 잇는 37번 국도 길목의 경북 상주군 화북면 운흥리나 충북 보은군 산외면 신정리가 들머리다. 이번 산행에서는 보은군 신정리에서 출발했으나, 산꾼들은 상주군 운흥리 화평동에서 출발해 마당바위, 토끼봉, 첨탑바위 등을 거쳐 상학봉에 이른 뒤 묘봉-북가치를 거쳐 용화골로 내려오는 산길을 더 선호한다. 이 길이 신정리 주차장~거북바위~묘봉을 거쳐 다시 신정리로 돌아오는 길보다 바위가 더 아기자기하다. 또 본격 산길이 시작되기 전 길게 이어지는 널찍한 임도도 신정리 길의 단점이다. 하지만 운흥리 길에 비해 신정리 길이 짧고 쉬워 등산 초보자에게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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