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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눈을 피하셔? 뭐 찔리는 거 있어?”
22일까지 장충체육관서 공연 ‘쾌걸박씨’
신정아 사건·대선 등 풍자… 통쾌한 웃음 박돈규 기자 coeur@chosun.com
입력 : 2007.12.01 00:03 / 수정 : 2007.12.01 11:12
신정아 사건·대선 등 풍자… 통쾌한 웃음
입력 : 2007.12.01 00:03 / 수정 : 2007.12.01 11:12
- 소낙비 내리는 날에도 장충체육관엔 손님이 많았다. 해마다 이 무렵 이 체육관엔 체육이 없다. 마당놀이 공연장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극단 미추는 올해 여기서 ‘쾌걸박씨’(배삼식 작·손진책 연출)로 관객을 끌어당기고 있다. 사방이 트여 있고 무대·객석 구분이 없는 ‘마당’의 놀이성을 추구해온 마당놀이는 일반 공연장엔 들어앉을 수 없다. 군밤, 귤, 오징어 등을 먹으며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마당놀이만의 특징. 체육관 주변엔 노점상이 즐비했다.
올해 27년째인 마당놀이는 정치·사회 풍자가 강점이다. 언제나 ‘지금 여기’의 현실을 무대로 불러낸다. ‘쾌걸박씨’에는 학력위조, 신정아·변양균 사건, 미국산 뼈있는 쇠고기, 대통령 선거 등이 ‘풍자감’이 됐다.
지난해 ‘변강쇠전’은 부동산 문제, 도박 게이트, 코드 인사를 밀어넣었다. 2005년 ‘마포 황부자’는 장기(臟器) 밀매와 재테크 열풍을 담았고, 2004년 ‘삼국지’는 전쟁과 테러, 대량살상무기, 악의 축, 줄기세포, 파병 찬반 시위로 1년을 갈무리했다.
늘 그렇듯 마당놀이의 출발은 길놀이와 고사(告祀)였다. 소원성취를 바라는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무대 한쪽에 차려진 제사상 앞으로 나와 돼지 입에 ‘배춧잎’(만원권 지폐)을 물리고 두 번 절을 했다. 지폐를 돌돌 말아 돼지 콧구멍에 꽂는 관객도 있었다. 백발 성성한 노파부터 열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까지, 소원 비는 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 마당놀이 쾌걸박씨 /극단 미추 제공
드디어 공연 시작. 관객을 향해 큰절로 문안을 올린 꼭두쇠 김종엽이 “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큰일이 있지요? 수많은 후보들이 저마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데 우리네 마음은 왜 이리 헛헛하기만 할까요”라고 넋두리하자, 윤문식이 직사포로 쏘아붙인다. “초장부터 씨부렁거리기는. 믿는 놈이 바보지. 한두 번 속아봐. 벌써 열일곱 번째여.”
온 국민의 관심사인 대통령 선거를 현실 풍자의 첫 번째 메뉴로 써먹은 셈이다. 윤문식은 재빨리 다음 표적을 올린다.
“지저분한 놈들은 따로 있어. 겉으로는 도덕이 어쩌고 온갖 고상, 우아는 다 떨면서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놈들, 변 같은 놈들!” “(관객 한 명을 노려보다) 왜 눈을 피하셔? 뭐 찔리는 거 있어? 이메일 조심해!” 학력위조 파문에 대한 품평은 애교에 가깝다. “내가 예~일대는 못 나오고 예대 나온 잡놈 광대지만, 최소한 뒷구멍으로는 안 까, 대놓고 까지.”
‘쾌걸박씨’는 고전 ‘박씨전’에 고대 그리스 희극 ‘리시스트라테’를 섞었다. 병자호란 직후가 배경인 이 마당놀이는 이시백(윤문식)이 뼈있는 쇠고기를 수입하라고 강요하는 청나라 칙사를 쇠뼈로 두들겨 패 전쟁 위기를 초래하고, 박색인 시백의 부인 박씨(김성녀)가 청나라로 가 여자들의 성(性)파업을 일으켜 전쟁을 막는다는 이야기다.
국악관현악 연주에 맞춰 “오늘 오신 손님네 반갑소~”로 유명한 합창이 끝나면 ‘마당놀이 인간문화재’ 윤문식·김성녀·김종엽 트리오가 나와 주인공 박씨부터 뽑는다. “(박씨가) 겉 다르고 속 달라? 정치하는 사람인가?” “특수효과팀들은 죄다 대선 캠프 갔어. 속이 시커먼 좀생이 도둑놈들 갖다가 허옇게 분칠을 하려니 특수효과가 필요할 거 아냐” 같은 대사들도 나와 관객을 웃긴다.
인간 바둑돌들이 등장하고, 바둑 대신 알까기로 혼사 여부를 정한다. 시백과 박씨의 정혼이 결정되면 한 무리의 여자들이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인다. “낙하산 정혼 결사 반대!” “혼사는 천하지대본” “밀실 야합 웬 말이냐!” “혼사가 장난인가?” 등 구호들은 너무 익숙한 형식이라 우스꽝스럽다. 박씨 부인의 외모 때문에 ‘리모델링’ ‘성형’ ‘리콜’ ‘반품’ 같은 단어들도 불려나온다.
극중 청나라는 지금의 미국과 비슷하다. “말로는 북벌을 외치면서 청나라 딱지만 붙으면 환장을 한다”는 대목에서 또 한 번 웃는다.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나온다. 임금이 “썩기는 전하 쪽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던데요”라는 대신의 말에 “어떤 놈이 그라드노? 깜도 안 되는 것 갖고 소설 쓰지 말라 캐라. 내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제” 했는데, 삼정승이 직권남용·청탁·로비·뇌물수수로 ‘큰집’에 불려간다.
대기업 관련 비리도 빠지지 않는다. “수십 만냥씩 해처먹는 큰 도둑놈들이야 아무 탈 없지. 건드리면 국가경제에 영향이 어쩐다나 뭐라나. 그것들은 꼭 재판받을 때만 되면 없던 병도 만들어 휠체어 타고 나타나데….”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배우들과 관객들이 무대에서 신명나게 노는 뒤풀이로 막이 내린다. BBK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없는 데 대해 연출가 손진책은 “특정 대통령 후보를 편들거나 깎아내릴 수 없기 때문에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쾌걸박씨’는 선거일 직후인 이달 22일까지 공연된다. (02)368-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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